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이지 유신 (문단 편집) === 메이지 천황의 즉위까지 (1854~1868) === 막부가 천황의 칙허 없이 굴욕적인 외교 조약을 처리했다는 사실에 대해 강경파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예전부터 막부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웅번[* 여러 번 중에서도 세력이 강한 번]들이 막부와 대립각을 드러냈고, 젊은 하급 무사들 사이에서 천황을 받들고 외세를 물리치자는 [[존황양이]] 사상이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처음에 이 젊은 무사들은 [[일본도]]를 들고 외국인이나 친외국 세력을 모두 베어버리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후 현실을 깨닫게 되자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우고 막부를 타도하자는 쪽으로 태도를 전환했다. 이들을 '토막파(討幕派)'라고 부르는데 특히 다이묘나 번의 상층부가 존황양이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조슈 번]], [[사쓰마 번]], [[도사 번]], [[사가현|히젠 번]] 등에서 토막파 무사들의 영향력이 거셌고, 조슈 번의 [[요시다 쇼인]]과 같은 사상가들은 많은 토막파 문하생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다만 사쓰마 번의 경우에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다이묘가 막부의 편에 서 있었다.] 반면에 막부는 강경책과 유화책 사이에서 우왕좌왕 하면서 대응의 일관성을 잃었고, 결과적으로 막부의 권위만 계속 실추됐다. 한편 외국 무역상들에 의해서 일본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으면서 민중 폭동이 줄을 잇기도 하였다. 일본의 [[금]]값이 국제 시세보다 싸다는 것을 알아차린 외국 무역상들이 일본의 금화를 대량으로 유출하였는데, 이에 막부 정부는 금화에 불순물을 섞어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화폐 가치 저하는 당연히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발생시켰으며, 특히 도시에서 곡식 가격이 폭등하였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견직물|비단]]을 짜는 생사[* [[누에나방|누에]] [[고치]]에서 나온 실] 가격이 싸다는 점을 이용해 외국 무역상들은 일본에서 생사를 쓸어담아 중국에 팔았는데, 이 때문에 당시 일본의 주요 산업이었던 비단 직조 산업이 붕괴돼 버렸다. 반면 저렴한 외국산 [[면직물]]이 밀려들어왔지만, 막부 정부는 불평등 조약 때문에 이를 막지 못했다. 서민 생활이 어려워지자 도시와 농촌에서 폭동이 잇달았고, 결국에는 막부의 군대가 출동하여 겨우 진압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1860년 막부의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토막파 미토 탈번 낭인들에 의해 암살되자([[사쿠라다 문 밖의 변]]), 막부는 다이묘들에게는 유화책을 펼치고 대신 과격한 무사들을 탄압하려고 했다. 막부는 각 다이묘가 스스로 개혁을 수행하고 서양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게 하였는데, 이 시기를 전후로 사쓰마 번과 죠슈 번 등이 개혁[* 이라고 쓰고 밀무역이라고 읽는다.]에 성공해 막부 못지않는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또한 막부는 교토의 천황 조정과 에도 막부의 제휴, 소위 공무합체(公武合体)라고 불리는 합의를 제안했는데, 이 조치는 여러 웅번들에게 막부의 의사결정권을 교토에서 열리는 다이묘 회의로 대폭 옮기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막부에게는 막부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좁은 의미였다.] 막부는 공무합체운동으로 여러 다이묘들의 호의를 살 수 있었지만, 다이묘와 무사들을 갈라놓고 토막파 무사들을 억누르겠다는 계획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1862년부터 1863년 사이에 전국에서 존황양이를 외치는 무사들이 교토로 몰려들었으며, 고메이 천황은 이들에게 화답하여 막부에 양이[* 외세를 물리침.]를 실천하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압박에 몰린 막부는 1863년 5월까지 양이를 실행하겠다고 천명했지만, 현실적으로 양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은근슬쩍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조슈 번의 양이파 무사들이 무단으로 미국과 프랑스 등의 외국 선박에 포격을 가했다가 미군과 프랑스군의 보복 공격을 받아서 박살이 난 사건이 벌어졌다.([[시모노세키 전쟁]]) 막부는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나섰고, 이 때문에 1864년 교토의 존황양이파 무사들이 조슈로 퇴거했다가 천황의 신변을 확보하여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반란을 일으켰다.([[금문의 변]]) 반란은 막부측의 사쓰마-[[아이즈 번|아이즈]] 연합군에 의해 조기에 진압됐고, 막부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조슈 정벌에 나섰다.([[조슈 정벌#s-2|제 1차 조슈 정벌]]) 막부는 사쓰마를 비롯한 여러 친번의 군대를 소집하여 대군을 끌고 왔고, 이를 상대할 수 없다고 여긴 죠슈 번은 최고위 3명의 중신들이 [[할복]]하고 급진 토막파들을 다 쳐내면서 막부에 항복했다. 1865년부터 막부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진행시켰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군대에 서양 무기와 서구식 훈련을 도입했고, 서양의 과학 기술과 학문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막부 내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개혁의 속도는 미진했다. 또 막부뿐 아니라 몇몇 웅번에서는 광범위한 사회정치 개혁이 벌어졌는데, 특히 조슈 번에서는 출신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정치 구조를 간소화시키는 개혁이 시행되었다. 1866년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등극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지난 100여년간 지속된 무능한 쇼군들과는 달리 상당히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는데, 그래서 역사가들 중에 요시노부에게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막부가 최소한 수십년은 더 지속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문제는 실제 역사에서 요시노부에게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슈 번의 토막파는 1864년의 패배로 힘을 잃었지만 완전히 뿌리뽑힌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토막파는 서양 무기와 서양식 편제를 이용해 비정규군을 육성했고, 특히 부대 편성의 임무를 맡은 [[타카스기 신사쿠]]는 무사가 아닌 농민의 입대를 허용하는 참신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뒤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세운 이래로 250년이 넘게 농민이 무기를 소유하거나 군사 훈련을 받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있었다.] 1865년에 벌어진 조슈 번의 내전에서 토막파의 무사+농민 혼성부대는 보수파를 격파하고 번의 지배권을 탈환했다. 토막파는 번의 풍부한 재정을 쏟아부어 영국으로부터 무기와 함선을 구입해 막부에 대항해 싸울 군비를 갖추었다. 하지만 조슈 번 혼자만의 힘으로는 막부와 친막부 다이묘들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한편 사쓰마 번은 조슈 번처럼 토막파 사족들의 세력이 크고 수십 년 전부터 진행된 개혁을 통해 막부에 대항할 만한 풍부한 재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막부의 편에 서 있었고 지난 1차 조슈 정벌에서는 막부 진영으로 조슈와 싸우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슈와 사쓰마가 막부에 맞서 동맹을 맺기에는 외부인의 설득이 필요했다. 도사 번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가 조슈와 사쓰마 사이에 가교를 놓아주었고, 1866년 비밀리에 [[삿초 동맹]]이 맺어졌다. 막부로써는 조슈에 토막파가 복권한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66년 여름 조슈를 응징하기 위해 군사 행동에 나섰으며 여러 친번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였다.([[조슈 정벌#s-3|제 2차 조슈 정벌]]) 하지만 조슈와 동맹을 맺은 사쓰마는 병력 파견을 거부했고, 사기가 낮았던 막부군은 참패를 당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막부 체제의 붕괴가 현실로 다가왔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도사 번주는 사카모토 료마 등의 조언에 따라 막부에 중재안을 제시하였는데, 막부 대신에 다이묘 회의가 담당하는 [[상원]]과 사족들과 서민들로 구성된 [[하원]]이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정부를 구성하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1867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 제안에 응해서 막부를 폐지하고 권력을 천황에게 봉환한다는 [[대정봉환|대정봉환(大政奉還)]]을 승인하였다. 대정봉환으로 인해 도쿠가와 가문은 쇼군의 지위를 잃지만 여전히 거대한 직할지를 소유하고 상원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이렇게 평화롭게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나 싶었는데, 이러한 중재안은 조슈와 사쓰마의 반란 세력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1867년 11월 조슈와 사쓰마 동맹군은 교토로 진군하여 황거를 확보하였고, 1867년 사망한 고메이 천황에 뒤이어 막 등극한 [[메이지 천황]]에게 [[왕정복고]]와 도쿠가와 가문의 축출을 선언하게 하였다. 막부군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병했지만 교토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했다. 에도로 퇴각한 막부군은 1868년 4월 승산이 없는 싸움을 계속 하기보다는 새로운 질서에 편입하기로 결정하고 전투 없이 에도를 무혈개성하며 항복했다. 이렇게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정부가 수립되면서 일본의 근대화에 포문을 연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반란군을 불신한 친막부 다이묘들은 저항을 계속하였고, 토막파 군대는 북진하여 1869년까지 싸워 이를 진압하여야 했다.([[보신 전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